노자 도덕경 설명서 1장_번역 및 해설(고급 버전)

노자 도덕경 1장의 번역 및 해설(원문 포함)이다. 이 글은 번역과 해설의 기준을 포함한 조금 더 난이도 있는 내용을 실었다. 왕필이라는 주석가의 해석에 바탕을 두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이해하는, 도덕경의 번역과 해설을 하나 추가하는 마음으로 쓰는 중이다. 다양한 번역과 해설이 그 책이 가진 맥락을 더욱 확장해 줄 것으로 믿는다. 대중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해설은 아래에 실었으니 참고 바란다.  

1 번역

‘도’라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전체/우주/하나)가 아니고,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부분/개념/다수)이 아니다. 그리하여 천지(물리적 시공간이자 삶의 현실)가 시작되는 지점을 무명(규정할 수 없는 무엇)이라 일컫고, 온갖 만물이 비롯되는 지점을 유명(규정할 수 있는 무엇)이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오직 없음(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 양태)에서 미묘함(우주 또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고, 있음(이름붙일 수 있는 존재 양태)에서 오묘함(우주 또는 존재의 경계)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둘(무와 유)은 전혀 다른 영역이 아니라 어떤 하나를 가리키는(또는 어떤 하나를 드러내는) 서로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명과 유명을 똑같이 ‘까마득하고 아득하다’고 표현하는데, 까마득하고 아득한 가운데에서도 더 까마득하고 아득한 곳(어둠 속 어둠이나 안개 속 안개 마냥)에 비유할 수 있다. 이에 ‘모든 비밀(신비롭고 오묘한)의 문’이라 일컫는다.


2 원문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3 해설

1)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도’라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매우 유명한 구절로 도덕경 1장의 첫 문장이다. 고전에서는 언제나 첫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모든 학자들이 이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도道는 이 우주이기도 하고 우주의 원리를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도라는 공간에서 인간이 살아가고 그 도의 원리에 따라 또한 인간이 살아간다. 물론 도에 대해 이것이 실체이냐 현상이냐, 원리이냐 운용이냐 그런 논의들도 뒤따른다. 철학적 접근에 따른 질문이자 탐구에 따른 논의이다. 도는 거대한 전체이자 통일된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떤 특정한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기에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가可’란 여기에서 ‘~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가능성’ 또는 ‘개연성’이란 뜻의 단어인데, 영어로는 ‘It can be said’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또는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다 정도의 번역이 가능하다. 한자는 영어와 같은 어순이기에 앞의 ‘가도可道’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이라는 설명이 되고, 도道는 설명의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이성과 감성 또는 직관과 직감 같은 인간의 인식 또는 지각 같은 것들은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한계를 지니기에 이 우주 전체나 우주 자체를 완벽하게 알기는 부족하고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이름이다. 이름名은 언어이기도 하고, 개념이기도 하며, 제도이기도 하고, 바람직한 모범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엔 이름이 있다는 점에서 사물의 분화를 가리키고, 사물로 분화되었다는 점에서 다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어떤 것을 정의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그것을 다른 사물과 분리하여 구분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쪼개고 나누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예로 든다면, 사과에는 빨간 사과, 초록 사과가 있고, 부사니 아오리니 등등의 사과에도 수많은 품종들이 있다. 이렇듯 ‘이름이 생긴다’는 것은 ‘개념이 생긴다’는 의미이고 그런 점에서 분화이자 다수를 가리킨다.

2) 무명無名과 유명有名

한편으로, 사물에 정확한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제도의 정착이라 이해하기도 하고, 올바른 제도가 정착되고 그 이름에 걸맞게 세상이 경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름은 정의이자 윤리이기도 하다. 공자의 경우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명正名’을 통해, 통치제도를 정비하고 이를 운용하는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윤리의식을 갖추고 부정부패가 없도록 만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참된 이름 역시 그 이름에 걸맞은 본질이나 현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참된 도와 마찬가지로 참된 이름이라 할 수 없다. 내용과 형식이, 앎과 실행이 정확히 일치해야 ‘참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천지가 시작되는 지점을 무명無名(무어라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름 없음)이라 말했다. ‘천지’란 땅과 하늘이라는 뜻이지만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땅과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땅과 하늘로 상징되는 인간의 생활 공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 우주 자체를 천지라 부른다. 그 천지가 비롯되는 그 시점을 누가 알 수 있고 그것을 시작하게 한 것은 누구인가. 마치 빅뱅 우주론에 근거해 본다면, 빅뱅의 그 순간을 어떻게 알고 그 시작의 동력이나 계기를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또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것은 무어라 규정할 수 없고, 그래서 이름도 없고 개념으로도 따질 수 없다.

또한 온갖 만물이 비롯되는 지점은 유명有名(무어라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름 있음)이다. 이제 인간의 눈에 감각에 이성에 인식에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관찰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온갖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상상초월’이라는 말도 있다. 이 우주가 그렇다. 그래서 인식 가능하고 포착 가능한 지점을 가리켜 ‘유명’이라 말했다. 그래서 그것은 ‘만물의 어미’라 부른다. 세상엔 인간의 능력으로 인식 가능한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가 공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 없음(無)과 있음(有)

그리하여, 오직 없음(無,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 양태)에서 미묘함(우주 또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고, 있음(有,이름붙일 수 있는 존재 양태)에서 오묘함(우주 또는 존재의 경계)를 가늠할 수 있다. 본질과 핵심은 안으로, 깊이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라면, 현상과 너비는 밖으로, 넓이로 길게 돌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본질이 있고 현상이 있으며, 깊이가 있고 너비가 있는 곳이 바로 인간이 사는 곧 우주이자 천지이다. 그래서 미묘함과 오묘함을 볼 수 있다.

‘요徼’란 순행이나 경계란 뜻을 갖는데, 이에 비추어 우주의 가장자리 또는 순행, 여기에서 나아가 존재의 경계로까지 그 의미를 넓혀보았다. 본질인 있다면 본질이 적용되는 경계가 있을 것이고, 우주의 중심이 있다면 어느 곳엔 주변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 둘 사이의 가치가 다르진 않다. 무한한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그리하여 없음과 있음(무와 유)는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다.

본질은 그 존재의 가치이고, 존재의 현상은 그 존재의 드러나는 모습, 곧 형태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물론 존재가 본질보다 더 중요할 수 있지만 본질이 현상을 규정하고 현상이 본질의 한계를 만들어낸다. 본질을 더욱 깊게 바라볼 수 있다면 현상을 더욱 뚜렷이 알 수 있고, 현상을 오래도록 살펴보면 그 안에 담긴 본질이 드러나기도 한다. 본질이 사물이라면 현상은 그림자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그림자는 본질을 담고 있는 그림자이다.

‘없음(無)과 있음(有)’ 대신 ‘무욕(無慾)과 유욕(有欲)’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도덕경 전체 맥락에서 ‘욕심’은 매우 중요한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항상 욕망을 경계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직 ‘욕망이 없을 경우’에 존재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욕망이 있는 경우’에는 존재의 본질과 핵심을 놓치고 현상과 주변에 얽매인다는 의미이다.

4) 신비롭고, 신비로울 따름

그리하여 ‘까마득하고 아득하다’. 그 자체로 신비하니까. 신비로움 중의 신비로움. 인간의 인식으로 인간의 상상으로 다가갈 수 없는 세계, 4차원의 존재가 결코 5차원, 6차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이 곧 신비하다. 신비하고 신비할 따름이니, 노자는 ‘모든 비밀의 문’으로 일컫는다. 이 거대한 우주의 일부인 인간은 이 거대한 우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우주의 일부라는 점에서 인간도 그 자체로 신비롭다. 이것이 곧 노자의 ‘도道’이다.


4 완역 번역 및 새로운 해설은 여기에서

노자 도덕경 1-81장 완역 및 쉬운 해설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1) 노자 도덕경 1장, 삶에 대한 긍정
2) 부와 풍요의 철학, 노자 도덕경 1-81장 완역 (모음)
3) 노자 도덕경, 왜 부와 풍요의 철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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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1장_번역 및 해설(원문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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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1장_번역 및 해설(원문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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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1장의 번역 및 해설(원문 포함)이다. 이 글은 번역과 해설의 기준을 포함한 조금 더 난이도 있는 내용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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