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되어버린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한 구절이다. 이 말엔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아래에는 번역과 원문을 실었다.)
국가 권력은 국민에, 국민으로부터 시작
우선 ‘국민에 of the people’라는 개념은 국가 권력이 ‘국민에’ 의해 구성된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 이것이다. 사회계약설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 구절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를 ‘국민주권의 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가 성립의 3요소는 주권, 국민, 영토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과 국민이다. 영토가 없더라도 주권과 국민이 있다면 어디든 자리잡을 수도 있으므로. 국민이 없으면 ‘국가’라는 실체가 있을 수 없고, ‘주권’이 없다면 자신의 국가를 다스릴 권한이 없다. 영토가 없더라도 하나의 인간 집단이 있고, 그들 스스로 자신 집단을 하나의 국가로 여기고 통치를 해나간다면 그것 역시 주권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계약론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어떻게 보장되는가에 대한 사회 이론이다. 모든 인간이 천부(본래 갖고 태어난다는 의미)의 권리를 갖는데, 자연 상태(무정부 상태)의 인간 사회에는 이런 권리의 보장이 확실하지 않으니 계약을 맺어 그 권리를 국가 지도자에게 위임했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무슨 계약을 맺었다기보다 상징적으로 계약을 맺은 상태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국민이 자신의 권리를 정부의 수장이자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에게 위임하고, 대신에 그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는 내용의 계약이다. 서구 사회의 문화 전통에서는 기본적으로 상호 ‘계약’을 중시해 왔고, 그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링컨 연설의 핵심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자유와 평등과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미국(당시에는 북부)’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정부는 국가를 다스리는 권력을 국민(people)으로부터 획득하였으므로, 앞으로도 국민의 기본권이 지켜지는 나라를 위한 정부가 되겠다는 다짐이자,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에 대한 헌사였다.
국가의 운영은 국민에 의해, 국민의 뜻에 따라
다음으로 국가의 운영은 ‘국민에 의해 by the people’, 달리 말해, 국민의 뜻에 달려 있어야 한다. 물론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국가 운영이 반드시 ‘국민에 의해’ 움직이지는 않는다. 인구가 늘어나고 국가 규모가 커지면서 선거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제도로 정착되었다. 정치는 일종의 ‘전문직’의 영역이라 된 것이다.
현재 국민의 뜻을 직접적으로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은 ‘선거’이다. 한 표가 갖는 의미가 그리 크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표가 모여 국가 운영의 향뱡을 결정한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어느 당, 어느 대통령이 당선되느냐에 따라 국민의 삶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숱하게 경험했다. 정치인들이 신경을 쓰게 만들고, 더 나은 정치인에게 투표해야 한다.
선거의 좋은 점은 정부의 국가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 정권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대로 지속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선거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제도이다. 민주주의 시민은 선거를 통해 총칼을 겨누지 않고, 주먹을 쓰지 않고도 정권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화와 토론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말’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만큼 시민들을 향해 던지는 정치인들의 연설 또는 메시지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언론이 국민의 인식을 전달하거나 바꾸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언론을 선택하고 평가하는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이 요청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헌법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시끄럽다’. 의견이 다르고 의견이 맞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이것이 의 입법 과정에 반영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갈등이 빚어지고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폭력이 아닌 비폭력이 우선되어야 하고 결코 헌법의 정신과 한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국민을 위해 또는 국민을 향해, 국가의 목적은 국민의 안녕과 행복
마지막으로 정치는 ‘국민을 위해 for the people’야 한다. 물론 정치인들은 늘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하지만 실제 국민을 위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기본소득을 지급하거나 일자리를 만드는 것 등 국민을 위하는 일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정책들의 최종 목표는 결국 하나다. 바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고 기본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만일 이 목적을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천만금을 준다 해도(사실 주면 솔깃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국민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국민은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고 기본권을 실현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곧 국민으로서 갖는 의무이자 진정한 정치 참여이다. 이 의무는 마지못해 하는 의무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생각해 보자. 집을 가진 사람이 청소를 하고 수리를 하며 집을 가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집이 자기 소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소유인 주권과 기본권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나아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무는 한편으로 내가 이곳에 살아갈 수 있다는 권리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국민을 위해’라는 선언은 ‘국민을 향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모든 것이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면, 그 대의는 결국 국민의 이익이 돼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이 ‘국민’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속해 있고, 그들의 이익도 제각각이기에, 다수의 이익이라 해서 모두의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의견 조율이 필요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민을 대표하는 지도자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고 기본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한 그런 여건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지도자는 돈이 많거나 힘이 센 사람이거나 국민이 좋아할 것을 던져주는 사람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 정신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국민보다 희생하는 정치인이 필요
선거철이 되면 늘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이 등장한다. 물론 난 여기에 속하고 싶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속해 있다. 내가 이 나라를 떠나지 않는 한 이 나라에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국민을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아도 되니, 거짓과 욕심이 적은 정치인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정치인)에, 나(정치인)에 의한, 나(정치인)를 위한 나라가 되지 않길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