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던 이야기이기자, 내가 철학을 통해 나를 찾고 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나의 삶과 나의 철학적 생각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자신과 자기의 삶을 찾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계속 보완하여 서양철학과 엮어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많은 관심 부탁 드리며.)
철학이 던져준 나에 대한 질문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열 다섯 살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다. 도덕 교과서에 이런 말이 등장했다. 정확히 옮길 순 없지만 청소년이 되면 사람은 대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고. 어느 누군가에겐 그냥 스쳐지나갈 지루한 교과서의 한 문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한 마디였다. 처음으로 ‘난 누구지?’라는 철학적 물음을 던진 이후, 그 물음 앞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부터였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말 그랬다! 심지어 밥 먹을 때도 밥을 먹으며 생각을 했으니까.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타고난 달리기 선수가 잘 달리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엔 한 달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는 결심으로 살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그냥 생각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생각은 이랬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다. 나에 대해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나로서 살아간다 말할 수 있을까. 달리 보면, 내가 나에 대해 모르는데 잘 살 수 있을까? 나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이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나다운 건 또 무엇일까. 그리고 산다는 건 또 무엇일까. 또 의미있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의 청소년기는 이 질문들과 함께 진지하고 심각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철학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철학과가 정확히 뭘 공부하는지도 몰랐던 당시였는데, 어쩌다 보니 철학과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고 부모님과 주변의 강렬한 반대에도 꿋꿋이 철학과를 지원했다. 누군가에게 ‘철학관’을 차리면 돈을 잘 벌겠다는 얘기도 들었다. 당연, 사주를 보는 철학관과 철학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철학과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철학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지점에서 다들 의아해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했던 건 반성의 의미이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다. 실제 철학자들이 남긴 책에는 이런 말보다는 존재, 진리, 선악, 정의, 미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철학 공부를 통해 얻은 것들
그렇다고 철학 공부가 무의미하진 않았다. 좀더 깊게 사고할 수 있었고, 좀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고, 더 논리적으로, 더 고차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방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질문’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그것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에 이른다는 중요한 사실도 깨달았다.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란 누구일까?’라는 질문과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은 전혀 다르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도 전혀 다르다. 올바른 질문이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질문은 길잡이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해답이 되어준다. 질문을 많이 던져볼수록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살다보면 어느 한 방향으로 길을 걷다 다시 되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미 걸어온 길 다시 되돌릴 수 없고, 다시 되돌린들 답이 없기 때문이다. 때론 나를 감춘 채 가면을 쓰는 순간도 오고, 어쩔 수 없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다가오는 인생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 사람은 질문하는 법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슨 상관일까.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럼에도 질문하는 법을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젠가 다시 이 질문이 나답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일은 결국 ‘나답게’ 살고자 하는 데 있다. 내가 세상에서 별로 반기지 않는, 밥먹고 살 기술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 철학과에 간 것도 ‘나답게’ 살다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 나답게. ‘너처럼’도 아니고 ‘너답게’도 아닌, 나답게. 그렇게 나답게 살다 가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란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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